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순교자들의 신앙과 관련된 야외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천주교 및 외국인들을 배척하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박해시대 부산지방 목자 기념비
박해 시대 때 부산에 복음을 전파하신 신부님들
(리델 이 신부, 다블뤼 안 부주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장대돌
수영 장대골은 병인박해 당시 경상 좌수영이 있던 곳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순교의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동래 지역의 전교 회장이었던 이정식(요한)을 포함한 동래 순교자 8분이 1868(무진)년 군문효수 당하여 순교하였다. 수영장대가 없어지면서 버려질 위기에 처한 장대돌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옮겨와서 본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장대돌은 우리 고장 순교자의 용감한 죽음을 지켜본 증인과 같다.
돌형구
병인박해(1866) 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으로 일명 ‘돌교수대’라고도 한다. 법외형구로 목에 밧줄을 걸어 돌구멍에 꿰어 잡아당겨 죽였다. 그 밖에 순교자들을 고문했던 형구들은 박물관 내부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것은 복제품이다.
당간지주
원래는 관청에서 깃발을 거는 깃대였으나 박해 당시 교우들을 묶어놓기도 하는 형벌 도구로 사용되었다.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1821~1846, 새남터에서 순교)

성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라났다.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코,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서 수학하고 1844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국내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6월 5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황해도 해주 감영과 서울에서 네 차례의 문초와 40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배교시켜 인재로 등용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에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라파엘호 모형
이 배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고 신부, 다블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 끝에 강경 황산포에 상륙한 배를 본 따 만든 모형이다.
103위 성인시성 기념비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0여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한국의 순교 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했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성인 시성식은 아시아의 한 변방에 위치한, 숱한 순교의 피를 자양분으로 200년 교회 역사의 텃밭을 일군 조선 교회, 그리고 현대사의 고난과 역경을 분단의 현실 속에서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한국 교회의 최대 경사였다. 이를 기념하여 건립한 기념비.

최양업 신부상 (1821∼1861, )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신부이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 의 장남으로 1836년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와 북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 등지에서 공부한 뒤 1849년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귀국 전 한국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요동에서 사목하였으며, 1849년 12월 의주 변문을 통하여 귀국한 후 외국인 신부가 선교할 수 없는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의 산골에 숨어사는 교우들을 위해 12년 동안 오직 선교활동에 힘쓰시다 진천에서 여독으로 병사하셨다. 당시 유일한 한국인 신부로서 교리서의 번역 및 수 개의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널리 전파한 ‘땀의 순교자’ 였다.
성 김효임 골롬바·성 김 효주 아녜스 자매상

* 성 김효임 골롬바 (1814~1839, 서소문 순교)
* 성 김효주 아녜스 (1816~1839, 서소문 순교)
성 김효임 골롬바와 성 김효주 아녜스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다. 부친을 여읜 후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고,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매주 두 차례씩 대재(大齋)를 지키면서 병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성심껏 돌보아주어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감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이사해 살고 있던 경기도 고양 땅 용머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알아내려는 관헌에게 매우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두 자매는 학춤이라는 혹형 이외에 불에 달군 꼬챙이로 몸의 열세 곳을 지져대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지기도 하였다. 남자 죄수의 방에서는 갑자기 신비스러운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감히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두 자매는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형조판서의 신문에 겸손하고 영리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고, 신문 후 포청에서의 불의한 고문과 능욕에 대해 항의, 결국 자신들에게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 가게 되었다.그 후 두 자매는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비
199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과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기념비.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 기념비

1999년 12월 24일 자정,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육중한 청동 「성문」(the Holy Door)을 활짝 열어젖히며 역사적인 2천년 대희년의 문을 열었다. 예수 강생 2000년,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천년기의 막을 연 대희년의 개막은 실로 교회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건립한 기념비

연자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 끌고 돌린다. 정미소에 밀려 강원도 산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장독대

장류가 담긴 독과 항아리 등을 놓아두는 곳. 한국 가정의 필수적 설비로서 대체로 햇볕이 잘 드는 동편에 마련하는데, 대지가 넓은 집은 뒷마당에 만들고, 좁은 집에서는 앞마당에 만든다. 돌을 2∼3층 쌓아서 1∼2평의 높다란 대(臺)를 만들고, 맨 뒷줄에는 큰독, 중간에는 중들이, 앞줄에는 항아리를 늘어놓는다.가장 큰 독은 장독으로 쓰고, 중들이에는 된장·막장 등을 담아 두며 앞줄의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류·장아찌류를 담는다.